넥스트 리터러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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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OCUS / 관점 Perspective 1

연필, 생각의 인터페이스로 진화하다

Site as: 최형욱 (2022). “연필, 생각의 인터페이스로 진화하다”, 넥스트리터러시리뷰(NXR) 제2호 특집 관점1, http://www.nextliterac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61
기자명 최형욱
  • 입력 2022.09.13 10:30
  • 수정 2022.09.13 13:12

1. 연필, 생각을 출력하는 도구가 되다

쓰기의 기원은 수 천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3500년경 거친 표면의 나무판이나 점토판을 첨필(스타일러스 Stylus)이라 부르던 끝이 뾰족한 갈대가지나 금속막대로 긁어 쐐기모양의 설형문자를 쓰고 남겼다고 한다. 현재까지 기록으로 남아있는 최초의 문자가 이 때 이렇게 기록된 것들이다. 비슷한 시기의 이집트 문명에서도 첨필을 이용하여 상형문자를 기록했고 파피루스가 발명되면서 갈대줄기로 만든 펜과 식물에서 추출한 잉크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중국에선 기원전 3세기에 붓이 발명되어 죽간이나 나무, 비단 등에 기록되었고 서기 105년, 한나라 채륜에 의해 종이가 발명되면서 서서히 제지기술이 확산되었고 중세 유럽 깃펜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기록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렇게 쓰기는 쓰는 도구와 그것이 쓰여지는 대상과 함께 진화해 왔다. 쓰기는 곧 이 물리적 도구들을 통해 인간의 생각을 외부로 출력하는 것과 같으며 이렇게 출력된 생각과 지식, 그리고 의미의 발현은 어떤 형태로 남아 우리의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일조해왔다.
 

기원전 3세기 파피루스 공식 편지. wikipedia
기원전 3세기 파피루스 공식 편지. wikipedia

 

1564년, 영국에서 우연히 발견된 순도 높은 흑연덩어리는 혁명과도 같은 변화를 가져왔다. 흑연으로부터 가볍게 잘 써지고 동시에 잘 지워지는 연필이라는 도구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빠르게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쓰고 그리면서 수정이 필요했던 분야에 확산되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대중화는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1795년 프랑스, 콩테에 의해 흑연분말과 점토를 혼합해 부드럽게 쓰여지는 균일한 품질과 저렴한 가격의 연필이 발명되면서 부터이다. 쓴 것을 지움으로써 완전히 사라져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있고, 쓰던 것을 수정할 수 있음으로써 얼마든지 틀려도 되며, 그려놓은 윤곽선위에 물감이나 다른 재료를 덧칠할 수 있음으로써 바탕과 틀을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을 가진 연필이 등장했다. 이는 생각을 출력한다는 관점에서 더 빠르고, 더 과감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생각의 과정을 종이 위에 꺼내 놓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 뒤로 만년필이나 볼펜과 같은 새로운 도구들이 등장해 왔음에도 여전히 연필만이 가진 수정할 수 있는 사유의 능력을 제공했다. 사람들은 연필로 생각을 정리하고 아이디어를 출력하여 세상에 남겼다.

2. 디지털 시대 새로운 연필의 등장

개인용 컴퓨터 등장 이후 컴퓨터는 입출력이 가능한 도구로서 새로운 시장과 높은 생산성을 만들어냈다. 키보드와 마우스라는 새로운 입력장치를 통해 디지털로 변환된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고 공유되면서 놀라운 가능성들을 만들어냈다. 컴퓨터는 연필이 가지고 있던 언제나 수정가능하고 지웠다 썼다 할 수 있는 속성을 내재하고 있다. 컴퓨터 안의 모든 필기구는 연필과 같다. 워드프로세서에서의 선명한 글자는 언제든 썼다 지울 수 있고, 그림 소프트웨어에서는 붓이나 펜도 연필처럼 수정할 수 있다. 다만, 마우스와 키보드만으로는 물리적인 연필을 쥐고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 직관성과 정교함을 실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디지털 세상에서도 현실 세계처럼 연필을 쥐고 손 끝으로 생각을 담아내기 위한 시도가 계속 되어 왔다. 1979년 애플은 그래픽태블릿을 출시하여 스타일러스라 부르는 펜으로 입력을 시도했고, 일본의 와콤은 1984년부터 태블릿과 스타일러스만을 계속 개발해오고 있다. 기원전 수메르인들이 점토 태블릿 위에 금속 스타일러스로 썼던 글자가 이젠 디지털 태블릿 위에 디지털 스타일러스로 바뀌어, 사람의 생각이 머리에서 바깥으로 출력이 되자마자 다시 컴퓨터로 입력이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1993년 애플은 휴대용 노트와 같은 컨셉의 저항막방식 터치스크린이 적용된 뉴튼 메시지패드와 함께 스타일러스 펜을 선보였고, 1996년부터는 팜 컴퓨팅에서 PDA (Personal Data Assistant)라 부르는 포터블 디바이스와 스타일러스 펜을 출시하였다.이렇게 좀 더 현실과 가까운 물리적 속성을 지닌 디지털 연필을 구현하기 위한 시도들이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 왔지만 대부분 시행 착오의 과정을 겪었다.

새로운 입력방식이 본격적으로 우리 삶 속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은 애플의 멀티터치가 적용된 모바일 디바이스가 출시되면서 부터이다. 마우스와 키보드를 벗어나 손가락이라는 직관적이면서도 원초적인 입력방식을 이용하여 화면 위에 구현되는 가상의 키보드를 타이핑하거나, 노트패드위에 손가락 펜으로 메모를 남길 수 있고, 그림판 위에 손가락 연필로 스케치 할 수도 있는 만능 입력장치가 대중화되었다. 사람들은 손끝으로 만들어내는 세상에 매료되었다. 또 더 정교하고 디테일한 세상을 만들어내고 싶은 욕망을 갖기 시작했다. 삼성전자의 갤럭시노트에 소형 와콤 스타일러스가 적용이 되면서 사람들은 작은 스크린 위에 세밀한 선을 긋기 시작했고, 2015년에는 애플이 아이패드와 연동되는 애플펜슬을 내놓았다. 명실상부 디지털 연필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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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연필은 외형과 이름만 연필일 뿐, 실제 연필과는 많이 다르다. 칼로 뾰족하게 깎을 필요도, 두께를 조절할 필요도, 색깔별로 다양하게 구비할 필요도 없다. 한 자루만 있어도 연필도 지우개도 되고, 붓이나 펜도 된다. 수 만 가지의 색깔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고 여러 색깔을 화면 위에서 섞어 쓸 수도 있다. 그림의 일부나 전체를 복사해 다른 화면에 바로 붙여넣을 수도 있고, 펜 터치 한번으로 색이나 질감을 입힐 수도 있다. 아이디어를 스케치하면서 도형이나 사진들을 불러와 삽입할 수도 있다. 글자를 자동 인식해 다른 폰트나 데이터로 변환해 주기도 한다. 최근에는 물체를 연필로 직접 터치하면 해당 색깔을 자동으로 찾아준다거나 읽어드린 텍스트를 자동으로 입력하는 스캐너의 기능까지 탑재하려 하고 있다. 이쯤되면 우리가 알던 연필과는 완전 다른 존재라 해야 마땅하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우리의 생각을 꺼내놓고 사유하며 기록한다는 점에서 변함이 없다. 다만 그 능력이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막강하고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덕분에 디지털 연필은 컴퓨터의 입출력 도구로써 확고히 자리매김하면서, 사람과 디지털 세상 사이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인터페이스가 되었다.

3. 메타버스 공간에서 연필을 재정의하다

기술 발전과 함께 스마트디바이스의 평면 디스플레이를 넘어서는 가상공간들이 다양한 형태로 출현하고 있다.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을 포함하여 메타버스라는 세계관으로도 언급되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현상이 주목받고 있다.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이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로 가상화된 세상이며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로 구현된 3차원 메타버스 가상공간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쓰고 표현할 수 있을까? 양 손으로 쥔 컨트롤러는 그 물리적 실체와 상관없이 무엇으로도 정의되고 대상화된다. 칼이나 총이 되어 전장에서 전투를 벌일 수 있고 테니스 라켓이나 골프채가 되어 스포츠 경기를 플레이할 수도 있다. 물론 연필이나 붓이 되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컨트롤러 없이 맨손으로 무엇이든 집어들 수도 있다. 가상화된 공간안에 무엇을 객체화 할 것이냐, 그 객체에 어떤 기능과 속성을 줄 것이냐에 따라 무한한 상상력을 발현할 수 있다. 다양한 컬러의 스프레이를 들고 지하철과 건물들의 외벽에 그래피티를 그린다거나 대형 캔버스에 유화물감이나 아크릴 물감으로 풍경화를 그리기도 한다. 2차원 평면이 아닌 허공에 직접 3차원 브러쉬를 활용하여 거대한 입체 작품을 그림과 동시에 만들 수도 있다. 자유롭게 확대하고 회전시키면서 그 안에 내가 들어갈 수도 있고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축소하여 한 눈에 바라 보는 등 물리적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 상상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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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원 메타버스 가상 공간에서도 연필은 생각을 써내려가고 수정하면서 기록하는 본질적 속성을 유지한다. 메타버스 안에서 정교하고 세밀하게 동작할 수 있는 물리적 형체를 지닌 메타버스 연필이 개발될 수도 있다. 애플펜슬처럼 현실세계에서 한 손에 쥔 디지털 연필이 메타버스 안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다른 필기구로 사용된다. 제한된 표면 위에서만 동작한다는 제약을 벗어나 자유롭게 표현하고 출력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도구로 변신할 수 있다. 현실세계의 책상과 의자, 컴퓨터와 키보드를 가상현실내에 매핑하여 사용할 수 있듯이, 스타일러스나 태블릿을 인식시켜 연결함으로써 정교하고 디테일한 글과 그림들을 실시간으로 메타버스 공간에 동기화할 수도 있다. 새로운 필기구의 기능들을 매핑하여 자유롭게 생각과 표현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가상의 공간과 상호작용하고 제어할 수 있는 컨트롤러로 활용할 수도 있다. 단순한 디지털 연필이라기 보다 해리포터가 들고 있던 마법지팡이의 메타버스 버전이라 봐도 무방한 것이다.

4. 왜 다시 연필인가

연필의 과거와 기원으로부터 디지털 연필의 현재와 기능의 확장, 그리고 메타버스 연필의 미래와 상상까지 사유의 나래를 펼쳐봤다. 연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속성은 변함없지만 입출력 디바이스로, 또 상호작용이 가능한 컨트롤러로 진화 가능한 새로운 연필의 미래는 상상 그 이상의 기대감을 준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놀랍게도 다시 나무로 만들어진 아날로그 시대의 연필에 환호하고 있다. 연필은 기계식 샤프펜슬은 물론 디지털 연필과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아, 여전히 그들과 공존할 뿐 아니라 과거의 향수가 아닌 새로운 문화로 사랑받고 있다. 디지털 기술은 편리하고 강력한 기능의 연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선이 그을 때 느껴지는 사각거림과 촉감, 나무의 향기와 따뜻함, 연필마다 각기 다른 개성과 특성, 그리고 연필깎기나 칼로 깎을 때에 생기는 불규칙성과 손으로 직접 전달되는 경험들은 현재의 디지털 연필이나 미래의 메타버스 연필이 가지기 어려운 감성적 요소가 아닌가 싶다. 기술이 만드는 편리함은 스마트하게 수용하지만, 인간 본연의 감성과 자연으로부터의 따뜻함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선택 덕분에 앞으로 몇 십년이 지나도 흑연으로 만든 연필은 어떤 형태로든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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